지옥의 생활바카라 제3장

제 3장

다음날, 전화기 너머로 석이는 호탕한 웃음을 뽐내며
내게 연신 축하의 말을 전했다. 동시에 금액조절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언젠가 한번은
뚜껑이 열리는 시기가 올거라 말했다.

뚜껑이 열린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땐 미쳐 알지 못했다.
" 진수야, 반드시 뚜껑이 열리는 날이온다. 그때는 절대!
절대로! 배팅하지말고! 나한테 바로 전화해라 알겠나 "

회사의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업무에 들어서자
따분함과 지루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어젯 밤 느꼈던
오르가즘의 휴유증일까? 자꾸만 눈 앞에 8과 9의 숫자가
아른거린다. 딜러의 목소리가 귓가에 희미하게 맴돌기 시작한다.

[ 뱅커 승 ] [ 내추럴 나인 ] [ 타이입니다 38분 축하드림니다 ]

어느덧 회사업무는 끝이나고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어젯밤 벌어들인 300만원이 아직도 꿈같고 믿기지가 않는다.
마침 여자친구 정화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는 대학교 시절
스터디모임에서 알게되어 꽤 오랜기간 연애를 해오고 있었다.

몇 주뒤면, 5주년을 기념하는 날이 찾아온다.
아직 둘다 사회 전선에 뛰어든지 오래된 편은 아닌지라
결혼은 미루고 있지만, 양쪽 집안의 도움도 받고 대출도 조금 낀다면
크게 문제는 없을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진지한 사이였다.

" 오빠, 일 끝났어? "

" 응 인제 끝났다. 지금 나가는 길이다 "

" 나 오빠네 회사 근처인데,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

회사를 나서니, 정화가 와 있었다.
단정한 블라우스 반팔에, 검정 슬랙스, 긴 생머리와
사슴같은 눈망울. 코에 찍힌 미인점. 오늘따라 새삼 이뻐보인다.

" 오빠! "

정화가 손을 흔들며 내게 달려온다.
아직 차를 마련하지 못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한다. 문득 석이의 차가 생각났다.

" 정화야, 힘들지않나? 이렇게 걸어다니는거 "

정화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있다.
하지만 정화는 생기발랄한 웃음으로 대답한다.

" 응? 이게 뭐가 힘들어 오빠. 다 이렇게 다니는걸? "

정화는 내 분수에 맞지않는 좋은 여자임이 틀림없다.
고운 심성과 넒은 아량과 배려심, 무엇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다. 그렇기 때문일까,
차도 없는 스스로에게 약간의 죄책감이 밀려온다.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백반집을 찾아 앉았다.
김치찌개와, 삼치구이를 시키고는 얼마뒤 있을 5주년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 오빠는, 5주년에 뭐하고 싶어? "

사실 매번 기념일마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
이제 막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바쁘게 회사생활을 하다보니, 일일히 기념일을 챙기며
연차를 내 여행을 다니기도 힘든 현실이었다.

우리는 매년 기념일을 보잘것 없지만 형식상 챙겨왔다.
가벼운 외식이라던지, 케이크라던지, 꽃다발을 선물한다던지.
하지만 이번 5주년만큼은 확실히 챙기고 싶었다.
어쩌면 바카라로 돈을 벌어, 해외여행을 한번 계획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해외여행한번 갈까? "

정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생각해보니 우리가 5년간 만나며 해외여행을
한번도 가지 않았다는걸 깨닫는다.

" 해외여행 어디로? 돈 엄청 많이 들텐데.. "

" 뭐, 가까운 일본도 괜찮지 않겠나?
이제와보니 우리 여행다운 여행 한번 못해본거 같네 "

" 정말.. 일본? 나 한번도 못가봤는데! 도쿄? 오사카? "

정화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정화는 식사내내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곧있을 해외여행에 설레하며 기뻐하는거 같았다.
어린 아이처럼.

[ 그래. 오늘 밤 좀 더 따보자. 할 수 있다 진수야. ]
신작로! 청출어람!

정화와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의자에 앉았다.
익숙한 화면들을 지나, 입금 버튼을 누른다. 컴퓨터 속 잔고에
또 다시 100만원이 충전된다.

어느덧 나는, 방 안에서 흡연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가서 담배 필 시간조차 없었다.
아니, 시간이 아까웠다.

고요한 방 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천천히 깊게 빨아들인다.
읽을줄 모르는 육매와 원매를 살펴본다.
플레이어 줄이 5개가 내려와있다.
타야할까. 꺾어야할까.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12초간 깊은 고뇌에 빠져본다.

뱅커에 50 배팅. 꺾기로 했다.
플레이어에 숫자 6이 떨어진다.
씁.. 위험하다. 뱅커의 숫자를 봐야한다.
뱅커에 숫자 7이 떨어진다.
옳지!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플레이어에 숫자 3이 뜨거나 2가 뜬다면..

나의 패배가 유력하다. 아니 확실시 할것이다.
제발..
플레이어에 한번 더 숫자 2가 떨어진다.
아..! 안된다. 이러면 가능성이 없어진다.

적막이 흐르는 방 안-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걸 느낀다.
호흡이 조금씩 가빠오고, 머릿속에는 ' 한번만 ' 이외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 한번만. 한번만 '

잠시 후, 딜러가 패를 뽑는다.
뱅커에 숫자 2가 떨어진다.
뱅커 승! 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기적적으로 9대8 승리를 맛본다.
짜릿한 도파민이 터져나온다.
이윽고, 몇번의 먹고 죽음을 반복하다보니
흥미는 점점 떨어진다. 이러다가는 잠도 못자고
하루종일 책상앞에 앉아 있어야 할 판이다.

고민 끝에 과감한 배팅을 하기로 한다. 올인.
현재 시드는 170이다. 딱 두번. 제발 두번만 먹자.
그럼 원래 돈을 제하고도 600만원 가량을 먹을 수 있다.

다시한번 줄을 찬찬히 쳐다본다.
이번에는 플레이어가 3줄까지 내려왔다.
원래 같으면 나는 꺾을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올인 뱃이기에 반드시 타야한다.


플레이어에 10k를 무한클릭하며
잔고에 숫자가 사라질때까지 배팅한다.
플레이어에 숫자 7이 떨어진다..
이윽고 뱅커에 숫자 10..
그리고 플레이어에 숫자 6..
플레이어 도합 3 뱅커는 아직 10이다.

위험하다.. 뱅커에 숫자가 만약 7.8.9가 떨어진다면..
이윽고 뱅커에 숫자 A가 떨어진다.
휴.. 한숨 돌린다.
플레이어에 떨어지는 카드를 천천히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숫자 6.....6....6...!
플레이어 도합 9!
이윽고 뱅커에 J가 떨어진다.

아. 이번에도 이겼다. 그래!
진수야! 이거잖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군대에서 새벽근무하며 피는 담배보다
더 맛있게 느껴진다.

1시간여가 더 흐르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사이트를 닫을 수 있었다.
통장에 꽂힌 돈을 바라봤다.

입금자명 이진수.
금액 3천5백만원.
나는 오늘 3천4백만원을 땄다.
나는 바카라의 신이 된 듯하다.

그리고 그 신이 지옥 불구덩이로 빠져들기까지
그리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 4장에서 계속 -